호패에는 사진 대신 무얼 적었을까
전자 신분증 실시를 앞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전자 신분증이란 지금의 주민 등록증과 의료 보험 카드 그리고 은행의 신용 카드까지 하나로 합쳐 조그마한 전자 칩에 그 내용을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를 실시하려는 쪽은 이용의 편리함과 관리의 효율성을 내세우고 있고, 반대하는 쪽은 개인의 사적인 정보를 국가가 일괄 관리할 때의 부작용과 악용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사실 주민 등록증 제도를 실시할 때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주민 등록증과 같은 제도가 조선 시대에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호패였다.
호패법은 조선 건국 초기인 태조 7년(1399)부터 검토해 왔으나,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실시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그리하여 태종 13년(1413) 9월 1일에는 호패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12월 1일부터 전국의 모든 관리와 백성들에게 호패를 차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음 제정된 호패법에는 호패의 크기와 재질, 그리고 기재 항목과 벌칙에 대해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호패는 길이가 3촌 7푼, 너비가 1촌 3푼, 두께가 2푼이고, 위는 둥글게 하고 아래는 모가 나게 한다. 2품 이상은 상아를 쓰나 보통 때는 사슴 뿔로 대신하고 대궐에 들어갈 때만 사용한다. 4품 이상은 사슴 뿔을 쓰나 보통 때는 회양목으로 대신한다. 5품 이하는 회양목을 쓰나 보통 때는 자작 나무로 대신하고, 7품 이하는 자작 나무를 쓴다. 위의 등급은 아래 등급의 것을 사용할 수 있으나 아래 등급은 위의 것을 사용할 수 없다. 서민 이하는 잡목을 쓴다. 본인이 호패를 만들어 바치도록 하며, 관에서 도장을 찍어 허락하고 자기가 만들 수 없는 사람은 나무를 바치도록 해 장인에게 만들게 한다.
호패에 기재할 항목은, 현직 관료는 관직만 기재하고 그 외 사대부는 전직·성명·주소를 기재한다. 서민의 호패에는 얼굴은 무슨 색이고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를 덧붙인다. 군관은 소속 부대와 키를 적고 잡색인은 종사하는 부역과 주소를, 종들은 소속 집안과 나이, 주소, 얼굴 색, 수염 유무, 키를 적어서 낙인을 찍는다. 고위 관료는 기재하는 것을 면제한다.
이처럼 호패는 재질만 달랐을 뿐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차고 다니게 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신분이 낮을수록 호패의 기재 항목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호패법을 실시한 배경을 알 수 있다. 곧 호패법은 전체 인구를 파악하여 국가의 통제 아래 둠으로써 조세와 부역을 지우려는 것이 우선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호패법의 실제 대상자는 사대부와 현직 관료가 아니라 그 밖의 신분 계층이었다. 이들에게 호패법은 결코 반갑지 않은 제도였다. 따라서 호패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부역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남의 집 노비가 되는가 하면 이미 받은 호패를 위조하기도 했다. 호패에 붓으로 기재 내용을 쓰던 것을 칼로 새기도록 한 적도 있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세종 대왕도 호패법 시행이 부진한 것을 여러 차례 따져 물었으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세조 9년(1464) 1월 12일 왕은 호패법을 강력히 실시하기 위해 일부 내용을 개정했다.
1. 당상관(정3품 이상 벼슬아치)의 호패는 상아를 쓴다. 소 뼈·사슴 뿔도 통용한다. 3품 이하 천민에 이르기까지는 잡목을 쓴다.
1. 비록 양적에 올라 있지 않더라도 여러 해 동안 양인으로 지내고 보증인이 있는 사람은 양인으로 간주한다.
1. 천적에 올라 있지 않은 자는 양인으로 하되, 비록 천적에 올라 있지 않더라도 천민으로 부역을 담당해 온 사람은 천민으로 간주한다.
1. 양인 이하는 얼굴 생김새를 쓰되 얼굴의 흉터·애꾸눈·귀의 쪼개짐·언청이·절름발이 같이 외모에 표가 나는 것은 모두 기재한다.
1. 몰래 다른 사람의 노비가 되거나 양인을 노비로 기록한 사람은 곤장 100대에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긴다.
이처럼 호패법은 강화되었지만 호패법의 실시는 계속 부진했다. 인구의 약 1∼2할만이 호구 장부에 등록되고 호패를 찬 것이다. 호패 제도는 고종 때에 와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몇백 년 동안 그것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죽은 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