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에 걸친 자유 부인, 어을우동 모녀
1480년 10월 18일 「성종 실록」은 어을우동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교수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교수형의 명분이 필요했는지 「성종 실록」은 이 여인이 11명의 남자와 인연을 맺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을우동은 마치 1990년대 미국의 가장 자유 분방한 부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5백 년 전에 해냈다. 상대방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행동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관계한 남자 가운데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팔뚝이나 등에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뿐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성과 가족 제도로부터 해방된 여인 어을우동은 많은 실적을 쌓은 끝에 의금부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의금부의 조사 과정에서 어을우동은 대사헌(요즘의 안기부장) 노공필을 비롯한 수많은 고위 공무원들의 이름을 둘러대었다. 그것은 간통한 죄로 어을우동과 같이 갇혀 있던 이난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예전에 유감동은 간통한 자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사형을 면했다. 너도 마땅히 노공필·어유소·김세적·김칭·정숙지와 서로 간통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특히 고위직 인사들이 어을우동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나섰고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었다. 따라서 ‘관계한 사실’을 고집하는 어을우동을 빨리 처단해 사태를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벌을 면하자는 게 결국 자기 죽을 꾀를 낸 셈이 되었다.
어을우동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을우동이 사형당한지 8년 뒤인 1488년 8월, 이번에는 어을우동의 친오빠인 박성근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조카와 음모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8월 22일의 「성종 실록」은 박성근이 자신의 어미를 죽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박성근이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미가 잠잘 때에 발이 넷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미인 정씨가 이 때문에 아들을 미워해 밤이 되면 반드시 박성근을 궤짝 속에 가두었으며, 의복이나 음식은 노비의 자식처럼 주었다. 또한 그가 장성한 뒤에는 토지와 노비를 적게 주어 박성근이 이것을 원망하더니, 드디어 정씨의 조카인 정소와 함께 어미를 죽였다.
박성근의 어미는 어을우동이 살아 있을 때에도 어을우동 못지 않은 행실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문란한 생활을 성토하면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다만 내 딸이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 너무 심할 뿐이다”며 옹호하기도 했다.
딸 어을우동은 간통죄로 교수형을 당하고 어미는 딸과 같은 죄를 범해 아들의 손에 죽었다. 어미를 죽인 아들 박성근은 매를 맞고 옥에서 죽었으며, 박성근의 아내는 의금부에서 문초당하는 박성근에게 “너는 마땅히 빨리 죽어야 한다” “너는 늘 나를 버리고자 했으나 다만 내가 양반 출신인 까닭으로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이다”고 말하는 것을 비롯해 불순한 태도를 취하다가 의금부 당상관들의 미움을 사서 함께 처벌받았다.
보고를 받은 성종은 말한다.
박성근의 한 가정은 모두 사람 같지 않으니, 그 처도 아울러 신문해 함께 처벌하라.
어을우동은 비록 실패하긴 했으나, 고위직 인사들과 관계한 뒤에 그들의 명단을 손에 쥐고 있으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리고 비록 관계한 여자가 처벌되거나 지탄받는 일은 있어도 그 고위직 인사들은 별탈 없이 여전히 고위직을 유지한다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