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재수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 이순신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처럼 이순신 장군은 임진 왜란이라는 난세가 만들어 낸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더욱 유명해진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뭇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 왔으며 직업 군인답게 전쟁터에서 산화해 갔다. 나라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군사 전략가로서의 지혜, 그리고 그의 인간적 풍모와 됨됨이는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에 비해 오늘날의 이순신은 대단히 신비화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용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성해서는 완벽한 장군이요, 신하요, 효자였다. 그는 아마도 신과 인간의 가운데쯤에 위치하는 인물로 선전되었다. 시골 초등 학교에까지 그의 모습을 담은 조잡한 동상이 세워졌고, 어린이들은 이 ‘민족의 성웅’ 동상 앞에서 경배하도록 교육받았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일까? 박정희 대통령과 제3공화국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만든 ‘이순신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 사연을 『조선 왕조 실록』에서 만날 수 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이순신의 관운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문반을 지낸 집안의 자손인데도 무인의 길로 나섰다. 28살인 1572년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재수 끝에 4년 뒤에 실시된 무과에서 성적순으로 제3등급에 해당하는 병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섰다. 선조 20년(1587) 10월 함경도 변방의 만호(종4품의 무관)로 있던 이순신은 오랑캐의 습격으로 장병 10여 명이 피살되고 10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가자 지휘 책임을 추궁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병마 절도사(오늘날의 군사령관)의 보고에 따라 비변사에서는 이순신을 서울로 잡아 올릴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렇게 지시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마 절도사로 하여금 곤장형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이순신은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4년 뒤인 1591년에는 전라좌수사(정3품의 해군 지휘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파격적인 인사 발령에 대해 조정에선 시비가 일었다. 「선조 실록」 1591년 2월 16일의 기록을 보자. 사간원은 왕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종6품의 지방 수령)으로서 아직 군수(종4품)도 역임하지 않았는데 좌수사로 임명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취소하옵소서.
그러나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취소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평상시의 규칙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해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이틀 뒤 사간원의 신하들은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이순신은 경력이 아주 얕으므로 여론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로 승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 번 열리면 뒤의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취소시키소서.
그러나 왕은 거듭 “이순신의 일에 대해서는,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어찌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고 했다.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이순신을 등용한 선조는 바로 1년 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덕을 톡톡히 본다. 이처럼 이순신은 결코 아무나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성웅은 아니었다. 반대로 누구나 본받을 수 있는, 실수와 실패를 극복하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이것이 오히려 이순신의 진면목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