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최대의 하수도 공사
한양을 조선 왕조의 수도로 정한 것은 개국 2년 뒤인 1394년 8월이었고 수도를 옮긴 것은 같은 해 10월이었다. 그러나 한양은 아직 사람이 살지 않은 허허 벌판이었다. 1395년 1월 한양 주위에 성을 쌓기 시작해 9월에 완성했다. 동대문은 1397년 4월, 남대문은 1398년 2월에 준공했다. 그러나 서울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몇십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새로운 수도 서울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바로 한강의 홍수였다. 비가 와서 조금만 물이 불어나면 가옥이 물에 잠기고 길이 끊기기 일쑤였다. 집밖에다 물을 버리면 고이고, 고인 물이 차면 낮은 데를 찾아 흐르던 시절이었다. 제대로 건설한 하수도가 없었으며 자연스레 생겨난 개천은 바닥이 높아 홍수 때 수해를 불러일으켰다. 태종 11년(1411) 12월 1일 왕은 대대적으로 개천 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명령했다. 인력 동원에 신중한 편이었던 태종은 “이번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다음해를 기다리거나 또는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며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때마침 농한기이니 부담이 적을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 날의 「태종 실록」은 구체적인 논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운하를 파는 일을 의논했다. 임금이 물었다.
“서울에 운하를 파는 일을 각도에 알렸는가?”
좌정승 성석린이 대답했다.
“내년 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한다고 이미 충청도·강원도에 알렸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올해는 윤 12월 15일이 입춘이니, 정월의 날씨가 반드시 따뜻할 것이다. 2월을 기다리면 농사일과 겹치게 되니, 정월 보름에 일을 시키도록 하라. 올해에는 경상도·전라도도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또한 소집하는 것이 좋겠다.”
지의정부사 박신이 대답했다.
“경상도 백성에게는 충주창(경상도에서 조세로 거둔 쌀을 수로로 운반해 충주로 모았음)을 짓는 일을 이미 지시했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렇다면, 노역을 겹쳐서 할 수 없으니, 전라도의 백성에게 부역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예조에서는 뒤늦게 개천 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정지할 것을 건의했다.
“월령(한 해의 행사를 다달이 구별하여 정해 둔 것)에 ‘정월에는 대중을 일으키지 말라’ 했습니다. 지금 대중을 움직여 운하를 파는 때가 경칩이 되었으니, 청컨대 정지하소서.”
임금이 말했다.
“운하를 파는 데 편하고 불편한 것은 의정부와 승정원이 이미 알고 있다.”
의정부에서도 아뢰었다.
“새 수도의 이 공사는 빨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지금 기계가 이미 갖추어지고 군인의 수가 이미 정해졌으니, 정지해 그만둘 수 없습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공사에는 일반 백성들만이 아니라 군역을 치르고 있던 군인들도 동원되었는데, 그 수가 지금 기준으로 5개 사단 병력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이 때 동원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군인이 모두 5만 2,800명이었다. 태종이 “5만여 명이 먼 길에 쌀을 지고 왔으므로 그 양이 반드시 넉넉지 못할 것이다”고 하면서 군자감의 쌀 4만 400섬을 내서 군인에게 각각 3말씩 주어 보름치 양식을 준비하게 했다. 군인 가운데 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의 수가 3백 명에 이르렀는데 모두 놓아서 돌려 보냈다고 「태종 실록」은 전한다.
오늘날 서울의 개천을 만들고 바닥을 파내는 데 뿌려진 선조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제 서울의 개천은 대부분 도로 밑으로 숨어들어 그 지저분한 모습을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그리고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 자동차들만이 복개천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