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명의 고관을 정부로 둔 서울 시장의 딸
조선이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도입한 이래 여성들의 삶은 어항 속의 물고기 또는 감옥 안의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유교 문화가 완전히 뿌리 내리기 전인 조선 초기의 활달한 생활 양식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도덕면에서 비난으로 얼룩진 몇몇 스캔들만이 당시의 자유 분방한 여성 현실을 간접적으로 말해 줄 뿐이다. 3류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남성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는 유감동 또한 활달한 조선 초기 여인의 특수한 사례다.
명예 서울 시장을 지낸 유귀수의 딸로서 무안 군수 최중기에게 시집 간 유감동은, 남편이 평강 현감으로 부임하고 있을 때 병을 핑계로 서울로 올라와서는 그 뒤 전설이 되어 버린 간통 행진을 계속하게 된다. 세종 9년(1427) 8월의 「세종 실록」에 기록된 것만 해도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고위 관료는 38명이나 된다. 특히 그녀는 영의정 정탁과 관계하면서 그의 조카인 이조 판서 정효문과도 정을 나누었고, 시누이의 남편인 정3품 벼슬아치 이효랑과도 관계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종서 장군은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아 “정효문은, 그의 숙부 정탁이 간통했는데 이를 알면서도 고의로 범했고, 이효량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간통했습니다. 두 사람의 행실이 짐승과 같으니 모름지기 추궁해 다스리소서” 하며 세종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고관 대작들이 관계된 사건인지라 세종도 어쩔 수 없었다. 왕의 답변을 들어 보자.
이 여자를 더 심문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부가 십몇 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도 끼여 있으므로 일의 윤곽이 벌써 다 이루어졌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결정해도 될 것이다. 다시 더 심문한다 하더라도 이 여자가 어떻게 모두 기억할 수 있겠는가. 정효문은 숙부 일은 알지 못하고 간통했다고 말했고, 또 공신의 아들이니 다시 심문하지 말라.
세종은 또 사헌부에 이르기를, 서울에 거주하는 자는 직접 심문하되 지방으로 부임한 사람은 잡아오지 말고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것이다. 이 여파는 유감동의 처벌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건의 간통으로 죽음을 당하던 시대였지만 유감동은 먼 지방으로 쫓겨나는 데 그쳤다. 물론 유감동은 변방으로 유배 가서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세종 실록」은 전한다.
유감동의 타락은 지탄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38명의 고관 대작들을 놔 두고 유감동에게만 돌을 던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문란한 행각을 법적으로 보장받던 남성 위주의 사회에 반기를 든 용감한 여성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